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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울의 봄'이 재미있다는 입소문을 타고 있어요. 또 한 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하려나요? 영화가 재미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출중하니 '서울의 봄'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도 관심이 많아요.

     

     

     

     

    '서울의 봄'의 등장인물은 다 가명을 사용했어요. 사실 실명을 쓰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를 상영하기도 전부터 유족이나 관련자들이 상영금치가처분을 하는 등 논란거리가 되어 실제 상영을 못하거나 늦춰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그래서 가명을 쓰기로 했다는데 사실 영화의 역할만으로도 당시 인물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2·12 쿠데타 세력에 홀로 맞선 정해인, 오진호 소령

     

    '서울의 봄' 영화에서 정해인 배우는 잠깐 등장해요. 12월 12일 쿠데타 세력이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할 때 홀로 그들에 맞서 권총 한 자루 들고 특전사령관을 지키려고 하는 짧지만 강렬한 장면이 있죠.

     

    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장면

     

    이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정해인 배우가 열연한 오진호 소령인데, 실제 인물은 김오랑 소령이 모델입니다.

     

    그는 M16 소총으로 무장한 쿠데타 세력에 맞서 권총 한 자루만으로 저항해 보지만 결국 현장에서 총을 맞고 전사해요. 실제로 가슴과 배에 반란군이 쏜 실탄 6발 정도를 맞았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고요.

    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실제-인물-김오랑-소령-사진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실제-인물-인터뷰-장면

     

    김충립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은 13일 새벽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어요.

     

    "김오랑 소령이 권총을 꺼내서 실탄을 장전하고 있길래, '왜 그래 무슨 상황이야 어떻게 됐어 그랬더니' '지금 보안사에서 우리 잡으러 옵니다' 그래서 내가 '총을 안 가지면 살아 근데 총을 갖고 있으면 죽어' 이렇게 말린 거지"

     

    하지만 김 소령은 권총을 끝내 내려놓지 않고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무실을 달려갔고 결국 거기서 총상을 입고 전사했죠. 그때 김오랑 소령의 나이는 36살이었다고 해요.

     

     

    남겨진 가족들의 삶

    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실제-인물-김오랑-소령-사진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실제-인물-김오랑-소령-비석-아내-사진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김오랑 소령의 아내는 그 충격으로 시신경이 마비되어 실명했어요.

     

    그렇지만 남편의 사망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노태우 정권 때인 1990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 등을 상대로 소송까지 했어요.

     

    하지만 이듬해 부산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당시 경찰은 난간에서 떨어져 숨진 실족사로 결론지었어요.

     

    김오랑 소령의 형 김태랑 씨는 동생의 행동과 죽음에 대해 한동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조용히 있었다, 가만히 있었다, 겁이 나서 혼자서 막 울고 그랬다"며 김오랑 소령 사망 이후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명예회복?

     

    김오랑 소령은 눈을 감은 뒤에도 수모를 겪었어요. 쿠데타 세력은 그를 특전사 뒷산에 그냥 묻었다고 하는군요.

     

    이후 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에 보관되다가 1980년 2월이 되어서야 국립묘지에 정식 안장되었어요.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야 중령으로 추서 되었죠.

     

    다행히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에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했어요.

     

    하지만 당시 김관진 국방장관은 결의안에 대해 "(12·12 사건 관련) 대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라고 답하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어요.

     

    김오랑 중령이 졸업한 육사도 "검토 중"이란 말을 반복했죠.

     

    2014년 1월이 되어서야 국무회의에서 훈장을 추서 하는 내용의 수여 안이 의결됐었고 석 달 뒤 특전사는 김오랑 중령에 대한 훈장 전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때 국방일보는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라고 홍보했습니다. 같은 해 6월 김오랑 중령이 졸업한 김해 삼성초등학교 인근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어요.

     

    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실제-인물-김오랑-소령-흉상-사진

     

    추모비에는 "12월 12일 사태 때 상관을 지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 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히 대항. 정의를 수호하다 장렬히 순직하였으며"라고 적혀 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

    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영화-장면서울의-봄-정해인-오진호-소령-영화-장면

     

    신군부의 12·12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다고 해요. 영화에서는 막을 기회가 10번은 있었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정보·통신이 발달한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자들조차도 12·12 쿠데타 당시 가장 긴박했던 밤 9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해요.

     

    12·12 쿠데타를 과거의 역사로 배우다보니 이 사태를 누구도 막지 못할 엄청난 세력과 계획으로 이뤄졌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알고 보면 감독의 말처럼 쿠데타 세력이 총과 탱크를 앞세워 힘을 과시하긴 했지만 그들의 행동과 판단은 하찮은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1997년 4월에 전두환·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주도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형을 확정받았습니다. 검찰의 첫 판단과 달리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선례를 남기며 역사적으로는 물론 사법적 판단까지 이미 끝났습니다.

     

    하지만 12·12 쿠데타 주동자인 전두환 씨는 사망 전까지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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