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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이 예매율 1위로 흥행 몰이 중입니다.
실제 12·12 군사 반란을 모티브로 하여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밀도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출연진들도 명품 배우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들만의 해석을 곁들여 열연을 펼쳤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관람료가 상승하여 그냥 집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천만 달성 기대감도 있고 주말에는 주연배우들이 무대인사도 한다고 하니 오랜만에 명품 배우들을 만나러 극장에 가야겠어요.
서울의 봄 감독, 배우들의 말말말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전두광 패거리에 아무도 맞서지 않았다면 그들이 승리자로 영원히 기록될 수도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들에 맞선 훌륭한 군인들, 진짜 군인들의 시선으로 이 사태를 보면 관객분들이 반란군의 승리의 역사가 아닌 그들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는 역사 인식에서 시작하여 장르적으로 재미있는 요소가 상당하다며 영화적 재미도 자신하고 있습니다.
또 감독은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있던 군인들이 순간순간 어떤 걸 바라보고 판단하는지, 누가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지에 포커스를 맞췄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의 세력을 따라가고 묵인 과정도 나오는데 이렇게 내린 결정들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가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걸 관객 분들이 자연스럽게 느꼈으면 한다고 합니다.
황정민 배우는 자신의 대머리 분장에 대해 "어렵지 않았다. 특수분장 팀들이 워낙 잘해주셔서 기본 4시간 정도 걸렸다. 다만 콜 타임이 아침 7시이면 저는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해서 그게 힘들었다. 그거 말고는 힘든 게 없었다"라며 역시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대머리 스타일이 파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저는 이렇게 뜻깊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드린다. 좋은 작품, 좋은 배우들과 함께라면 대머리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복받은 거다"라며 역학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정우성 배우는 '서울의 봄' 출연에 대해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영화 나름대로 해석이 있는 거니까 실제 사건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내고 임했다. 극에 모티프가 되는 어떤 인물들이 배치가 되어 있지만 저 같은 경우 오히려 더 (실존 인물을) 배척하려 노력했다. 김성수 감독님 역시도 이태신이라는 인물이 실제 사건에서 가장 먼 가공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말씀해 주셨었다. 그래서 이태신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할까, 찾아가는 작업의 연속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감독님에게 많이 기댄 작업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니 개봉 첫 주 주말에 있는 무대인사도 상당히 기대됩니다. 놓치지 않게 서둘러 예매해야겠어요.
그럼 영화보러 가기전에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는 영화인 만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 있다면 더욱 몰입하여 영화를 즐길 수 있겠죠! 이제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서울의 봄 -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한민국은 그동안의 군부통치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기대감으로 가득해집니다.
'서울의 봄'은 이러한 민주화의 희망이 있었던 기간을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일컫는 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이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던 시절입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고 유신헌법 하에서 내려졌던 긴급조치가 해제되었고, 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직선제 개헌 논의는 지지부진하고,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을, 국무총리는 국내치안을 담당하는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통치형태가 논의되면서 바라던 민주화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영화의 배경이 되는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언론검열이 심하던 때라 시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자들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직감만 하고 있을 뿐 그날 밤 일어난 군부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신문과 방송이 대부분 정보의 출처이고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를 듣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기자들 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라면 이 사건이 이후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을 통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고 있는 동안 역사의 물줄기는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봄 - 군부의 정치 참여 타진
군사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탄압받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정치 거물이 정계로 속속 복귀합니다.
그리고 학내 민주화를 주로 문제 삼았던 학생들은 이제 대한민국 정치의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12·12를 통해 군부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정치 참여를 위한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차곡차곡 그들의 권력을 확대해 갔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애국심에서 비롯한 것인지 개인의 권력욕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역사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봄 -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커져만 갔으나 계엄령은 계속 되었고,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대통령제에 대한 이견과 언론 통제는 계속되었습니다. 검열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신문 기사란을 백지로 비워서 발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군부는 중앙정보부도 장악하여 정치 거물들의 정치활동을 폄하하고 구태정치로 보이도록 언론을 검열하고 보도에 대한 지침을 주기도 합니다.
대학생들의 활동을 정당화하거나 미담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고, 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조치하도록 합니다. 당시에는 노조이지만 사용자 편을 드는 어용 노조도 많았기에 이들 노조의 활동은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유신 시절 제적당한 학생들이 복학한 대학에서는 정치 민주화를 외쳤고 대학 간 연대하여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등을 외치며 정치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5월 15일에 서울역 인근에 10만 명에 이르는 대학생들이 모여 계엄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습니다. 10만 명이면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인원인라 볼 수 있는데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조직되지 않은 상황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유혈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다음을 기약하며 해산하였습니다.
이를 일컬어 '서울역 회군'이라고 합니다. 역사에 대한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는 가정적 상황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일이 있은 직후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12·12 군사 반란은 서울의 봄을 막아나서는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고민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본다면 영화의 재미가 두배가 될 것입니다.